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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by 호랑. 2021.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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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밀리의 서재 전자책/크레마 그랑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을 읽었습니다. 도쿄에서 결혼 준비를 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던 마요가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전화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그 진상을 밝힌다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마요는 다음 주에 있을 동창회를 두고 갈지 말지를 고민하던 중이었는데요, 공교롭게도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동창들을 조우하게 됐고, 그들을 용의선상에 두고 의심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까지 처하게 됩니다. 어릴 적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마요의 막막한 마음이 상상이 됩니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울적함이 없이 시원시원하게 진행됩니다. 사건을 풀어가는 다케시 때문입니다.

 

가미오 다케시는 마요의 삼촌, 즉 사망한 가미오 에이치의 동생입니다. 에이치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마요로서는 10년간 소식을 주고받지 않은, 제법 멀게 느껴질 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성큼 사건현장으로 들어왔고, 마요에게도 같은 태도를 유지합니다. 형님을 죽인 범인을 찾겠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이 남자는 상황과 인물들 사이를 거침없이 헤집고 다니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뽐냅니다. 교묘한 화법으로 상대의 속내를 끌어내고 몰래카메라와 도청기를 설치하고. 필요하다면 마술사인 자신의 전공을 살려 휴대폰 바꿔치기 같은 고급 기술도 선보입니다. 슬프게도 저는 그때마다 소설의 재미를 잃기도 했는데요. 제가 마술을 잘 몰라서인지, 갑자기 소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는 느낌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개연성이 안 보였고, 소설을 더 읽어야 할 이유도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더불어 말하자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교실 쇼’도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역시 저는 게이고가 쓴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건보다는 인물들 개개인이 사는 이야기가 더 진솔하게 다가오고 재미있었습니다. 막 나가는 듯하다가도 진지한 명대사를 날리는 다케시의 밀당에 조금쯤은 넘어간 상태이기도 했고요. 예고도 없이 시작되는 삼촌의 쇼에 뭣도 모르면서 조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는 마요의 순발력도 볼수록 매력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케미는 꽤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를 보면 다들 공감하실 겁니다.

 

이 소설은 코로나가 덮친 사회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마스크나 원격 근무 등 어느새 우리에게 일상이 되어버린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이름 없는 마을’을 설정한 것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되고, 외출 및 지역 간 이동이 줄어들면서 지역 사회가 짊어져야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말도 못 할 것입니다. 책 속에 나오는 마요의 고향은 관광지가 주 사업이었던 시골의 작은 마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와본 적이 없는 작고 평범한 마을입니다. 심지어는 이름조차 없다고 하죠. 어떻게든 마을의 활기를 되찾기 위하여 현지에 살고 있는 마오의 동창들은 부단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동창인 구기미야의 유명작인 ‘환뇌 라비린스’를 이용해서 젊은 사람들이 SNS 콘텐츠에 올리고 싶은 마을을 만들려는 게 그 일환이죠. 물론 생각처럼 잘 풀리지는 않습니다. 그때 작가는 주인공인 마요의 목소리를 빌어 “뭐야, 환라비 말고도 내세울 게 많잖아“, “그래, 이름 없는 마을에도 자랑거리는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쓴 소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국내도서
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역
출판 : 알에이치코리아(RHK) 2020.11.30
상세보기
· 다양한 가능성을 떠올린 뒤 순식간에 결론을 도출하는 다케시의 두뇌 회전에 마요는 탄복할 따름이었다. 이 사람이 기회만 생기면 조카를 뜯어먹으려는 악덕 삼촌과 동일인물이라니.

· “절대적인 효과가 있는 특효약이나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냥 버티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마요의 물음에 누마카와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툼한 목을 꺾었다.
“그런다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밖에서 술을 먹는 감각을 잊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리고 이 동네 자체에 매력이 없어. 관광객들이 와주지 않으면 코로나가 끝나도 딱히 나아질 건 없을 거야.”

· “나도 알아. 디즈니랜드가 거목이라면 이 동네는 도토리겠지. 고만고만한 작은 관광지들이 전국 각지에 널리고 깔렸으니, 코로나가 끝나면 도토리 키재기가 시작되는 거고.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경쟁에서 이겨야 해. 그러려면 미리 키를 좀 늘려놔야 하고. 안 되면 까치발이라도 들어야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 이 마을은 한 척의 배고, 우리는 모두 그 배를 탔어. 지금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조만간 침몰할 테고, 다 같이 물에 빠져 죽겠지.

· 여기 다 쓰러져가는 집이 있어. 문을 세게 여닫기만 해도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지. 너는 지금 그 집에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는 거야. 그냥 들어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거기서 살려고 하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언젠가 문을 세게 여닫는 날이 오겠지. 그때 무너진 집에 깔릴 바에야, 들어가기 전에 그냥 부숴버리는 게 낫지 않겠어?


_히가시노 게이고,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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